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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학적 자아가 느낀 날씨의 맛

김창길 2019. 12. 2. 15:39

2019. 12. 1.

 

2019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을 시작했던 1일 전국에 비가 내렸다. 기상청은 비가 그치면 북서쪽의 찬 공기가 몰려오면서 추워진다고 예보했고, 친절한 방송사 기상캐스터는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될 것이라며, 핫팩 등 방한용품을 준비하라며 걱정이고.

 

겨울이지만 춥지 않다……. 그럼, 겨울이 아직 찾아오지 않은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자연의 이치가 인간이 정해놓은 날짜에 맞추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달력을 보며 왜 계절이 날짜에 맞추어 변하지 않을까 궁금해 한다. 이른바 날씨에 대한 감수성에 따라 형성된 기상학적 자아는 역사적인 산물이라는 것을 <날씨의 맛>(책세상)을 쓴 알랭 코르뱅은 알려준다.

 

이제 비와 눈, 안개를 접하며, 또는 바람을 맞으며 개개인이 느꼈던 감정들이 남아있다. 이 모든 돌발적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상학적 자아의 출현이 포착되는 것은 역사의 어떤 순간에서인가? 그것을 느끼는 방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느 정도로 변모해왔는가? 오늘날, 앎에 대한 일상적 욕구로, 때로는 진정한 정신의학적 문제로 연결될 정도인 기상 현상이 불러일으키는 관심, 표현, 욕망, 쾌락, 혐오의 형태는 어떻게 변천되어왔는가?” (7)

 

겨울 같지 않은 겨울 날씨에 대한 한국인의 감성은 어떨까? 1년 동안의 기후와 날씨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보다 더 세분화된 24절기로 따지는 우리들의 감수성은 날씨의 변화에 더 민감하지 않을까? ‘겨울 같지 않은 겨울날씨가 지속됐다는 것은 겨울의 시작인 입동(立冬)이 지난 118일이었고, 얼음이 얼기 시작한다는 소설(小雪)22일이 지나도 추워지지 않은 날씨 때문일 것이다.

 

24절기는 태양의 황도상 위치에 따라 계절적 구분을 위해 나눈 중국 역법이다. 기준점은 황도상의 동지(冬至). 동쪽으로 15도 간격으로 점을 매겨 절기를 구분한다. 15곱하기 24360. 그래서 절기는 이틀 정도의 차이가 난다. 가령 큰 눈이 온다는 대설(大雪)127일 또는 8일이라 표기된다. 지난 동지의 시작이 1221일이었냐 22일이었나에 따라 달라진다. 2019년 대설은 127일이다.

 

날씨에 대한 서양인의 감수성을 다룬 알랭 코르뱅의 <날씨의 맛>에서 비에 대한 글들을 모았다. 장 자크 루소의 제자였던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는 1784<자연에 관한 연구>에서 비를 바라보는 기쁨에 대해 썼다.

 

"나는 예컨대 소나기가 내릴 때, 이끼가 내려앉은 오래된 담장 위로 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볼 때, 바람이, 비의 미세한 떨림과 뒤섞여 윙윙대는 소리를 들을 때 기쁨을 맛본다. 밤에 들리는 이 쓸쓸한 소리들은 나를 달콤하게 깊은 잠으로 빠져들게 한다." (12)

 

생피에르의 또 다른 문장은 상투적이지만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비가 올 땐 아름다운 여인이 우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녀는 애절해 보일수록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13)

 

월든 호숫가에서 자급자족하며 초절주의자의 삶을 살았던 미국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비를 좋아했다.

 

"바람이 내뱉는 마지막 숨결 아래 구름이 모여들고, 물방울을 똑똑 떨구는 가자와 나뭇잎, 친밀한 위로의 느낌,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진주알을 떨어뜨리는 젖은 나무와 초기지붕, 그것들을 감싸 안으며 따뜻한 마음의 표시로 몸을 살짝 숙이는 것 같은 비, 그 사이로 보이는 이 모든 것의 희미한 모습, 이것이야말로 두말할 나위 없는 나의 세계다.”(18)

 

하지만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비에 대한 감수성은 부정적이었다. 소설가 스탕달은 비를 영원히 내릴 것처럼 계속되는 질척하고 고약하고 밉살스러운 비(21)라 사적인 글에 썼고, 앙드리 지드는 1912212일 일기에 또 비가 오는 날씨다. 오늘 아침의 두통은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다.”(28)고 썼다.

 

갑자기 내리는 비는 일탈을 부추긴다. 갑자기 내렸기에 그것은 일상의 리듬을 위반하는 것이고, 금기를 넘어서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18세기 서간체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드 세비네 부인은 1671823일에 갑자기 내렸던 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처음에 우리를 적시기 시작했는데, 곧 우리 옷에서 죄다 물이 흐를 정도로 젖었다. 나무 잎사귀들은 잠깐 사이에 뚫려버렸고 우리가 입고 있던 옷도 순식간에 망가졌다. 우리는 모두 달리기 시작했다. 소리 지르고,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결국엔 집에 도착했다. 불을 크게 피우고, 모두들 내가 내어준 셔츠와 치마로 갈아입었다. 젖은 구두도 닦았다. 우린 다 함께 기절할 정도로 웃었다." (23)

 

소나기는 관능적이다. 에로틱한 사건을 일으킨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뇌우를 피해 찾아든 나무 밑에서 그의 연인 쥘리에트 드루에를 처음으로 포옹했다. 황순원도 마찬가지다. 단편소설 <소나기>는 시골 소년 소녀의 잔망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전한다. 비에 젖은 소년의 등에서 검붉게 물든 애틋한 사랑.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자기가 죽거든 자기가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구…….”

 

한 주가 무료해질 무렵인 수요일에 비가 내린다면 장미꽃을 사야한다. 갑자기 내린 비가 아니더라도 코트 깃을 올리고 꽃집 문을 두드린다. 밴드 다섯손가락은 꽃 한 송이를 손에 들지 한 다발을 들지 고민에 빠진다.

 

슬픈 영화에서처럼 비 내리는 거리에서

무거운 코트 깃을 올려 세우며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이번 주 수요일에는 비 소식이 없다. 무료한 한 주가 될 것이라고 전망해본다.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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