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책] 가려진 세계의 징후들
이스크라, 불타는 뉴스 본문
20세기를 목전에 둔 1900년 12월, 세계를 뒤흔들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적국 독일에서 신문을 창간했다. 제호는 "이스크라(Iskra)". 우리말로는 불꽃, 불똥, 섬광. 신문 이스크라의 좌우명은 이렇다.
"하나의 불꽃이 큰 불로 타오를 것이다!"
From a spark a fire will fare up!
노동자와 농민이 주축이 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결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던 레닌은 동명의 공산당 조직론을 1902년에 집필했다. 이스크라 제4호에 발표한 <무엇으로부터 시작할 것인가?>에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이미 이스크라 창간을 통해 실행에 옮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를 위한 전 러시아적 정치신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큰 불을 지피기 위한 쏘시개가 신문 이스크라였던 것이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났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지 20년이 지날 즈음, 러시아의 젊은 사진작가 팀 파르치코브는 불타는 신문을 들고 있는 사람의 연작 사진을 3년 동안 찍었다. 프로젝트 이름은 "불타는 뉴스(Burning News, 2009 - 2012)". 조국의 혁명가 레닌이 창간했던 신문 이스크라의 21세기 버전이라고 불러도 될까?
한 세기보다 긴 러시아의 시간은 연속적이기 보다는 단절된 역사였다. 세계를 뒤흔들며 건설됐던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은 또 다시 세계를 뒤흔들며 해체됐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났지만, 사회주의 국가를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젊은 사진가 팀 파르치코브는 사회주의를 이념이 아닌 소재나 아이디어로 소환한 듯하다. 그의 불타는 뉴스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조직했던 이스크라와 같은 불쏘시개가 아니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뉴스의 과잉으로 촉발된 불놀이다.
팀 파르치코브의 홈페이지(www.timparchikov.com) 갤러리를 온라인으로 관람했다. 하얀 눈밭 위에서 불타고 있는 신문을 펼쳐들고 있는 사람들의 복장은 노동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 지배계급의 옷차림은 아니다. 뉴스의 생산자나 주인공은 더욱 아니다. 하얀 눈밭이 어떤 백지 상태를 의미한다면 신문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뉴스 소비자들로 간주해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이들 모두가 금세라도 옮겨 붙을 정도로 타오르는 불길을 의식하고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촬영 방법이 궁금한 것이다. 러시아어를 안다면 사진 속 주인공들이 들고 있는 지면의 내용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우리나라 신문이었다면 조국에 대한 뉴스가 아니었을까?
홈페이지에서 10장의 '불타는 뉴스' 연작을 3번 돌려 본 후, 비디오 작품 하나를 봤다. 제목은 스노우맨(SNOWMEN). 월트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등장할법한 올라프 모양새의 눈사람 4명(?)이 불타는 신문을 들고 있다. 언덕 뒤에 불타버린 헛간에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샤이닝에 출연한 잭 니콜슨을 연상케 하는 도끼를 든 남성이 서서히 눈사람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비디오 작품 스노우맨은 불타는 뉴스 사진 연작의 결말을 알려주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결말은 적지 않겠다. 서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에서 오는 2월2일까지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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